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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 프로필 및 소개




출생일 1936년 09월 27일, 전남 고흥군

직업 전직 정무직공무원

성별 남성

학력 육군사관학교


학력

~ 1960 육군사관학교



경력

1985 ~ 1987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 부장

1981.07 ~ 1985.02 제5대 대통령경호실 실장

1980 제3공수특전여단 여단장

1977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단장

1967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 작전장교



프로필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33XXXXX21638



소개

제5공화국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 이른바 전두환의 베리야.

제30경비단장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장군을 배신하고 반란에 가담하였다. 장태완이 말한 "반란군놈의 새끼들", "역적놈의 새끼들" 중 한 명. 

게다가 실제로 장태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장세동을)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리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시절

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 채 제3공수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있겠나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듬해인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준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으로 인해 경호실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유임되어 직책을 계속 수행했던 것을 본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세력 견제용으로 장세동을 불러들인 차원을 넘어서서 권력다툼이 난무한 청와대 내부에서 장세동을 매우 신임하고 심적으로도 매우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84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한 후에는 전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청문회에서는 비교적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의리의 사나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조폭의 의리.


여러번 5공세력을 규합하여 정계에 진입하려고 했으나 너무나 음험한 이미지가 굳어져서 할 수 없었다. 

전두환이 나들이라도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때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어 12.12때 반란 가담혐의로 3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김영삼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합의를 통해 사면되었으며, 그 이듬해 복권되었다.



이후

2002년, 수 많은 정치인들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당적을 옮기는 등 철새 정치인 행보가 이어지자 의리와 소신이 사라지고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자신과 같은 의리 있는 사나이가 나서야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다 는 이유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기대한 전두환이 지원을 안해주면서 득표율이 처참할 듯 하자, 투표일 하루 전날 후보를 사퇴하였다. 


전두환의 말로는 출마 전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기어코 출마를 해버리자 "장세동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듣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무위키출처 : https://namu.wiki/w/%EC%9E%A5%EC%84%B8%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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