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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가 공직자 사직 시한 3분을 

남겨두고 심야에 경남지사 사퇴서를 냈습니다.

대선후보 등록을 하려면 지방자치단체당 

자리를 내려놓아야 하는게 당연하죠.


그리고 대선후보를 위하여 사퇴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고 하네요?






자세히 설명하면 


5월 9일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면 공직자는 

30일 전인 4월 9일까지 홍준표 지사는 공직 사퇴해야 합니다. 

경남지사 잔여 임기가 1년 3개월 가량 남아 있지만,




 9일까지 '도지사 궐위 통지'가 선관위에 

되지 않아 보궐선거는 치르지 못하게 된 것 입니다.




홍준표 지사는 보궐선거를 하게 될 경우 300억원의 도 재정이 투입된다며, 

이를 막기 위해 이날 자정께 도지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경상남도는 9일 밤 12시까지 홍준표 지사의 사퇴사실을 선관위에 통보하지 않았고,

 이에 도지사 보궐선거는 무산되었습니다.


9일까지 보궐선거 사유가 발생하면 5월 대선 때 

경남도지사 보궐선거가 함께 치러지지만, 보궐선거는 

사퇴를 선관위에 '통지한 날' 확정되므로 사유시한을 넘긴 것입니다. 



따라서 경남도의 경우 보궐선거 없이 도지사 대행 체제가 이어지다가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새 지사를 뽑게 되는 것 입니다.

이에 따라 경남도지사 자리는 앞으로 14개월 이상 대행체제로 가게 되었습니다.




국민의당 경남도당 윤수경 대변인




은 논평을 통해 "도정 농단을 획책하는 홍준표 전 지사는 

대통령 후보직에서 즉각 사퇴하라"며 "도민을 분노하게 만든

 홍준표 전 지사 사퇴시한 3분 전에 한 심야사퇴는 

그야말로 막장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을 했으며,



허성무 전 경남도 정무부지사는 




10일 보도자료를 통해 

"경남도민 모두에게 참담한 날이다.

 국정 농단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때, 

경남도민들은 도정 농단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며 "'헌법 수호자'가 되겠다며 대통령 선거에 나선 

사람이 반헌법적인 분탕질을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고 했습니다.




홍준표 지사의 사례로

선거법에 대한 보강이 필요해 보입니다. 



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0410055803500

http://v.media.daum.net/v/2017041005580350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15139&CMPT_CD=P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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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도지사 홍준표 프로필


출생일 1954년 12월 05일, 경남 창녕군

소속 경상남도 도지사, 자유한국당

직업 광역단체장, 전직 국회의원, 전직 검사

성별 남성

학력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前 4선 국회의원이자 현재는 경상남도 도지사에 재임 중이다. 검사 시절에는 그야말로 성역이 없이, 검찰 법무부의 수뇌부와 선배 검사 등을 줄줄이 수사했던, 당시 검찰에 몇 안 되었던 소신 검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1954년 12월 5일 창녕군에서 출생. 영남고등학교를 거쳐 1973~1977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땡전 한푼 없던 학생 시절에 고려대학교 구내의 서울신탁은행에서 일하던 여인에게 반하여, 전전반측 잠못 이루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그녀와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첫 만남의 자리에서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그녀와 결혼을 하였다.

대학 시절 한때 학생운동에 전념했고,사법시험에도 몇 번 응시하였다. 사법시험에 떨어진 어느 겨울밤에는, 아버지가 있던 울산에 내려갔는데, 거기서 바닷가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있던 일당 800원짜리 현대조선소의 경비원이었던 아버지를 보고서 눈물을 흘리며 불공평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그래서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당시 워낙 말랐기 때문에, 체중미달로 14개월의 방위병 복무를 명 받았다. 복무장소는 처가가 있던 전라북도 부안의 해안초소였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하였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스물아홉살 때인 1982년에 제24회 사법시험에 드디어 합격하였다.

법조인시절

홍준표 본인과 상대방의 말이 크게 엇갈리는 부분이 많으니 이 문서도 참조만 할것.


1984년에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검 검사시보로 부임하였으며, 부산지검, 광주지검, 서울지검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였다. 검사 부임 초기 1년간 2000건의 사건을 해결하였다.


1987년 6월 10일 부산지검 울산지청 검사를 거쳐, 1988년 8월 26일에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 검사로 부임하였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특수부에 재직 중이던 1988년 11월 23일에는 당시 치안본부 정보2과 분실장이던 서정희(徐政熙)를 구속기소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어 전두환의 외조카인 기업인 김영도가 다른 기업인들과 짜고 구속된 모 기업인에게 석방시킨다는 조건으로 뇌물수수를 받은 사실도 적발하여 구속 기소했다. 


1992년 8월 4일에는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검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파키스탄인 폭력조직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외 13명을 적발, 체포하여 그해 9월 22일 임란 사자드 외 3명에게 사형과 나머지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하였다. 또 다른 파키스탄인 조직폭력배인 비키파의 사자르 아크바르 알리(당시 19세) 등 10여 명에게는 징역 15년형을 구형하였다. 


1992년 10월 21일에는 보험금 7억 원을 노리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지하 나이트클럽에 방화를 한 폭력조직 목포파 부두목 유희호(兪熺昊)와 행동대장 홍동표(洪動杓) 외 6명을 방화혐의로 추적하여 체포, 구속하였다. 1993년 5월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 주임검사로 보직되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엄삼탁, 천기호(千基鎬) 경찰청 치안감, 그리고 대전지방검찰청 모 검사 등의 비리, 뇌물수수혐의를 입증하고, 이들을 모두 구속 기소하였다. 당시에도 협박과 압력을 많이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처리하였다.


심지어는 상사인 이건개 당시 대전고검장을 구속 기소하기도 했다. 돈을 받고 슬롯머신 업자에 대한 내사를 무마해줬다는 혐의였다. 그 후 이건개 전 의원은 뇌물수수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93년 5월에는 슬롯머신 사건과 동시에 정덕진의 빠칭코 사건의 수사를 전담하기도 했다. 5월 5일부터는 빠칭코의 대부인 정덕진을 구속수사하고 전담을 맡았다. 이들을 뒷골목 깡패가 아닌 '초보적 마피아'로 규정하고 치밀하게 수사하였다. 



정덕진을 수사하면서 고위층과 과거의 상관인 변호사들로부터 "다칠 수 있다"는 질책과 함께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전화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정덕진을 구속수사하여 빠칭코 관련자들을 색출, 적발하였다. 정덕진에 대한 수사를 지휘하던 당시 그는 이탈리아 사정검사의 대부 피에트로 검사의 사정활동 기사를 자신의 사무실에 항상 펼쳐두었다. 이때 성역없는 수사로 화제가 되었으나, 검찰과 법무부에서는 한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슬롯머신 수사의 절정은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 기소한 것이었다. 슬롯머신 업자에게서 5억 원의 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한 것이다. 박철언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박철언의 결백하다는 주장을 외면했다. 결국 박철언은 국회의원 뱃지를 반납하고 1년 4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스토리는 드라마 '모래시계' 등의 작품소재가 되었기에, 그 후 홍준표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사실, 홍준표 외에도 은진수 검사가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은진수는 시간이 흘러 뇌물을 받고 구속된다.


그러다가 1994년에는 법무부 특수법령과 검사로 부임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안기부 국제범죄수사지도관이 되었다. 이후 홍준표는 1994년 11월부터 1995년 9월까지 안기부로 파견을 나갔다.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이 된 것이었다.

1995년 9월 21일에는 법무부 특수법령과로 다시 복귀하였다. 그러다가 10월 2일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그 사직서는 10월 4일 수리되었다.검찰을 나오자마자 바로 변호사를 개업하고 방송 출연 등에 섭외되었다.


정치활동

변호사 개업 후에 슬롯머신 사건 당시 처벌 받았던 조폭들에게서 가족의 생사를 두고 지속적인 협박을 받았다. 결국 정계 입문을 다짐하게 되었고, 김영삼 대통령의 추천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원래 꽤 개혁적인 인사로 분류되어 꼬마민주당이나 국민회의 입당 가능성이 점쳐졌고, 본인도 꼬마민주당 공천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기택 총재가 꾸물거리는 사이에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입당을 제의하면서 신한국당에 입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뷰 그 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갑 선거구로 현역 국회의원인 조순환을 꺾고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젊은 나이 덕분인지 주로 소장파 역할을 맡았으며, 노동 최저 연령 상향을 발의, 통과시키는 등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치러진 보궐선거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을에 출마, 당선하여 국회에 복귀했다. 그리고 같은 지역구로 제17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4선 의원을 기록했다. 

2006년에는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장의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막판에 오세훈에게 밀려서 석패했다. 2008년에는 태권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2011년 7월에는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섰는데, 뚜렷한 조직세 없이 대표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대의원 유효 투표 11만 4372표 명 중 4만 1666표를 얻었으며, 2위는 유승민 후보(3만 2157표), 3위는 나경원 후보 (2만 9722표), 4위는 원희룡 후보(2만 9086표), 5위는 남경필 후보(1만 4896표)가 차지했다. 대표로 선출된 후 소감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계파없이 홀로 뛴 선거에서 저 홍준표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대의원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현대조선소에서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채 사채로 머리채를 잡혀 길거리를 끌려다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 여러분이 보여주셨다"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후, 민주당 손학규 대표에 맞서서 한나라당의 지지세를 조금씩 회복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지지율에서 민주당에 밀리고 다음해 총선 전망도 어두워지자 결국 승부수를 던지고 말았다. 2011년 12월에 “현역의원 전원의 불출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자기희생적이고 과감한 인재영입을 추진하겠다.” “현역의원과 당협위원장은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선수에 상관없이 의정활동과 조직활동으로 전원 재심사를 받도록 하겠다.” “재심사위원회는 전원 당외 인사로 구성해 공천심사위에 가기 전에 2단계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재창당 쇄신안을 내놓은 것. 그러한 쇄신안이 당내 모든 계파로부터 거부 당하자 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동대문을에 출마하여 국회의원 연임을 노렸으나, 민병두 후보에게 밀려 석패하고 말았다. 이명박의 실정에 분노한 서울 민심 때문에 당초에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지지율이 밀리는 양상을 보였고, 그것이 당연히 패배의 결과로 이어진 것. 어쨌든 앵그리 버드를 패러디하는 동영상도 찍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총선에서 패배한 후 몇 달 동안 야인생활을 하다가, 김두관 경남지사가 사퇴하여 경상남도 도지사가 공석이 되자, 2012년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경상남도 도지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거기서 야권의 권영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재기했다. 이후 2014년 6월,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당선되어 현재까지 2선 도지사로 연임하는 중이다.


이러한 여러 이력 덕분에 한때는 차기 대선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하단 문단에 있는 갖가지 논란으로 인해 2015년 이후 여론에서 대하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며, 대권은 사실상 멀어졌다는 의견이 다수다. 지역 여론도 좋지 않은 편이라 사실상 탄핵에 상응하는 주민소환까지 고려되고 있을 정도다. 물론 탄핵은 실제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주민소환에 필요한 총 유권자수 대비 10%의 서명을 받아 2015.11월 선관위에 제출된 상태이다. 다만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이기에, 실제 주민소환이 이뤄지기 위해선 중복서명 검사 등의 필요한 절차들을 밟기 어려운 상황으로, 총선이 끝난뒤에 명단 검토 및 주민소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홍준표 경남지사 주민소환운동본부’의 주도로 주민소환투표를 청구하는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게 심의를 요청한 상태이다. 주민소환은 경남 총 유권자의 10%인 27만명을 넘으면 홍준표의 소명을 받아 실시가 되는데 현재 신청 서명한 사람이 35만명이기 때문에 유력하다. 선관위에 의해 투표 공고가 나오면 투표일까지 직위는 중단된다. 이후 투표가 진행되면 총 유권자의 1/3이 투표한 가운데 과반수를 차지하면 직무가 해제된다. 만약, 해제가 되면 내년 4월 재보궐로 새로운 도지사를 뽑게 된다.


1심에서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추징금 1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현직 자치단체장(지방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다. 이에 홍준표는 항소하기로 했다.


선거이력  


출처 : https://namu.wiki/w/%ED%99%8D%EC%A4%80%ED%9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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